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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엮다

말의 바다를 건너는 책, 사전

2013/05/27

미우라시온 저/ 권남희 옮김

요즈음 읽은 책 중 정말 추천하고 싶은 책.
일본의 한 사전 편찬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다.

 

배를엮다

 

사전을 만든다라? 
그 일 참 지루하고 고단하겠네. 라고 단정지었던 초반 생각과는 달리 사전을 거의 완성해 가는 단계에서는 나도 모르게 손을 꽉 쥘 정도로 이 사람들의 ‘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고 흥미진진 했다. 배를 엮다는, ‘사전’ 이라는 배를 편집하고 있는 성실하게 그지 없는 ‘마지메’를 중심으로 아날로그적 가치와 감성을 건드리며 현대 사회에서 스치고 지나갈 법한 세세한 일의 방식까지도 이야기로 만들어 낸다. 

요즈음은 포탈 사전, 모바일 앱 등으로 몇 번의 타이핑만 하면 원하는 결과를 척척 찾아 보여주는 스마트한 세상이지만 모두 어릴 적 기억엔 얇은 사전 종이를 넘기며 손가락으로 아래 위를 훑으며 깨알 같은 단어를 찾아 밑줄을 그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배를 엮다는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종이사전을 대표하여 우리가 잊고 있는 것들, 기억해야 하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해 준다. 

주인공 마지메는 지나치게 꼼꼼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한 가지에 파고 드는 집중력이 무서울 정도여서 원래 속해 있던 부서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어둠의 세계에 있던 사람이었다. 사전 편찬에 적임인 후임을 찾기 위한 사수의 눈에 띄기 전의 마지메는 매일 아침 출근 길 지옥철에서 난 오늘도 똥을 빚으러 회사에 가는구나..생각하는 물에 물탄 사람 중 한 명 이었다. 자기 몸에 꼭 맞는 일을 찾는 다는 건 축복인 것 같다. 하루 아침에 마지메의 ‘이상함’이 사전 편찬에 꼭 필요한 ‘천부적 재능’으로 튀어 올랐으니. 

책을 읽으며 마지메의 성실함과 사전 편찬의 긴 여정에 감동한 건 물론이고, ‘말’이 가지는 중요성과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무심코 내뱉는 말 속의 무수한 단어들의 의미를 알기나 하고 쓰는 것인지 허공에 떠도는 말 중에 하나를 얹어다 쓰고 버리는 건지.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은 말을 바르게 뜻풀이 할 수 없겠죠. 사전 만들기를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과 사고의 지치지 않는 반복입니다. – 본문 중, 아스모토 선생 –

마지메와 아스모토 선생은 밥을 먹을 때에도, 걸어다닐 때에도 항상 새로운 단어를 마주하게 되면 메모를 하고 생각을 하고 의심을 한다. 그리고는 작업 중인 사전을 수정하고 삭제하고를 수 천 번 반복한다. 흔히 말하는 직업병을 넘어 보는 사람도 절레 고개를 흔들게 만드는 지독한 직업병. 사전 한 권이 나오기까지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력이 필요함을 이 두 사람을 통해 깨닫는다.

“마지메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끊임 없이 ‘운동하는 언어’가 지니고 있는 방대한 열량이 한순간에 보여주는 사물의 모습을 보다 정확하게 건져 내 문자로 옮기는 일이다. ” – 본문 중, 마지메 –

그저 월급을 받고 하는 일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사전편찬부의 이 사람들은 남다른 직업정신을 물론 책임감은 더 물론, 사전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는 사람들이었다. 방학을 이용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30여명의 대학생들마저도 불타오르는 책임감과 애정으로 1달 밤을 새며 사전 검토에 열심인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라면 어떤 일을 할 때 그렇게 기운이 열정이 넘쳐 흐르도록 일 할 수 있을까. 

“말이 갖는 힘. 상처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누군가와 이어지기 위한 힘을 자각하게 된 뒤로, 자신의 마음을 탐색하고 주위 사람의 기분과 생각을 주의 깊게 헤아리려 애쓰게 됐다. 말 이라는 새로운 무기..”  – 본문 중, 기시베 –

말은 때로 무력하다. 아라키나 선생의 부인이 아무리 불러도 선생의 생명을 이 세상에 붙들어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하고 마지메는 생각한다. 선생의 모든 것을 잃어 버린 것은 아니다. 말이 있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것이 우리들 마음속에 남았다. 생명 활동이 끝나도, 육체가 재가 되어도. 물리적인 죽음을 넘어서 혼은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선생의 추억이 증명했다. 선생의 모습, 선생의 언동. 그런 것들을 서로 얘기하고 기억을 나누며 전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말이 필요하다. 우리는 배를 만들었다. 태고부터 미래로 면면히 이어지는 사람의 혼을 태우고, 풍요로운 말의 바다를 나아갈 배를.

티 나게 일하는 법을 모르고, 그저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할 줄 밖에 모르는 마지메와 주위 사람들. 결국 오랜 세월에 걸쳐 배를 엮는 대 항해가 끝났다. 내 일도 아닌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리곤 구석에 처박혀 있던 국어사전을 꺼내어 한 장 한 장 넘겨 봤다. 검색이 최고라고 여겨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아날로그 사전을 보는 마음이 새롭다. 그러다 갑자기 세종대왕 느님을 예찬하게 되고 또 삼천리 만천리로 .. 

말이라는 새로운 무기. 누군가에게 전하고 누군가와 이어지기 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운동하는 언어. 잘 사용하고 있는지.
책임감을 넘은 애정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자신의 일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엮어가야 할 배는 어떤 것인지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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