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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

2014/11/23

아멜리 노통브 / 전미연 옮김

 

두려움과 떨림

 

사회 초년생 때였나.
열심히 잉크를 짜내어 몸을 날리는 복사기는 고사하고, 
한겨울 선배들의 코트를 얌전히 맡아주던 옷걸이만도 못한 존재감을 느꼈던 나날들이 있다. 
이럴거면 뭐하러 쌔가 빠지게 졸업하고 편입해서 숱한 굴욕 면접을 거치며 눈물로 까자를 먹었던가 후회스러울 정도로. 
지금 생각하면 겸손하지 못한 마음에서 우러난 격한 맘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선배였어도 갓 졸업하고 온 새파란 신입사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난감했을지도. 
무적의 신입사원을 외치던 나는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는 마음만 있었을 뿐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였기에. 

 

아멜리 노통브의 ‘두려움과 떨림’은 일본의 한 기업에 입사한 신입사원 서양 여인 사이토가 겪는 일들을 조금은 과장되게 희화하여 이야기한다.
사회라는 바탕에서 벌어지는 모욕과 에피소드와 그 안에서 비춰지는 일본 사람들의 문화와 정서에 대해. 

여성의 지위, 상하관계에서의 존재감, 누구를 위한 것에 대한 혹독한 대가.
말도 안되는 상사의 업무지시에 담겨 있는 메시지. 
사이토는 날마다 느끼고 날마다 자란다. 그들의 숲이 아닌 자신의 숲에서. 
부당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그들의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낙오자가 된다는 것, 당신을 밟지 않으면 내가 무너진다는 죽고 사는 법칙.
마치 지금 회사의 구성원이 지구의 마지막 사람들인마냥 경쟁하는 것. 여기에서의 문제만은 아니기에 읽는 내내 웃음과 슬픔이 같이 돌았다. 
혹독한 상사 후부키 역시 처음엔 사이토였을 터.

약속된 1년의 계약기간을 그들에게 속하지 않고 스스로의 숲에서 마감한 사이토가 절차대로 마지막 인사를 전할 때는 체계라는 형식만 있을 뿐 사람은 없었다.
흡수되지 않으면 눈감아 버리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 유미모토사가 모두 가지고 있었다.
얇지만 단시간에 덮을 수는 없었던 ‘두려움과 떨림’.

우리들의 사회는 어떤지. 

 

모리 양은 지금의 직책에 오르기까지 몇 년 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그녀는 당신이 유미모토사에 입사한 지 10주만에 이 정도로 승진을 했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거요. 
– 41p –

 

몇 주가 지나고 나는 점점 차분해졌다. 나는 이 상태를 송장의 평정이라고 불렀다.
중세의 필경사 수도승이라는 직업과 내 직업 사이에 별반 차이가 없었다. 나는 며칠을 통째로 글자와 숫자를 다시 베껴 쓰는데 보냈다. 
내 뇌가 평생 동안 지금처럼 회전 요청을 거의 받지 않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기막힌 고요함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회계장부로 하는 선수련이었다.
문득, 이렇게 달치근하니 넋을 놓고 40년 생을 보내야 한다 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고 내가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47p –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며 소리를 지른다. 눈을 뜨자 쓰레기가 보인다.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다시 심연으로 추락한다.
– 67p –

 

후부키, 그녀는 사탄도, 신도 아니었다. 그냥 일본 여성이었다.
– 72p –

결국 이런 어처구니없는 믿음을 통해 일본 여성들의 머릿속에 박히는 것은, 좋은 일은 절대로 바라지 마, 기쁨이 너를 파멸시킬 테니까. 
사랑에 빠지는 꿈을 꾸지마, 너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의 환상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지 절대 너의 진실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닐 거야.
삶이 너에게 무엇이든 가져다 줄 수 있다고 기대하지 마. 해가 지날수록 네게서 무언가 없어지게 될 테니.
평정 같은 단순한 것조차 바라지 마. 너는 평온해질 아무 이유가 없으니까.

일하는 걸 바라. 너의 성으로 보아 높이 올라갈 기회는 없겠지만, 그래도 회사에 충성을 다하기를 바라.
일을 하면 돈을 벌게 될 거야. 돈을 번다고 기쁨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어 결혼할 때 그걸 내세울 수는 있을거야. 
사람들이 네 본연의 가치 때문에 너를 원한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테니까. 
– 74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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