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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이어령

201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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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서서 읽다 안되겠다 싶어 구매했다. 
어른이 진심어린 마음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주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나이의 곱절보다 더 사신 분이 하루에 한 두시간씩 천천히. 묵직하게. 생각에 빠져들만한 주제들로.

책꽂이에 두면 언제 빼서 다시 읽게 되려나.
여기에 다시 꺼내서 정리해보자.

아. 실제로 참된 어른이 날 앉혀두고 이야기해주시면 더 좋을텐데.

 

엄살이 통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의 인간관계가 깊은 정을 기층으로 해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숲에서 늑대를 만났을 때 엄살을 부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인간의 이성사회는 엄살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엄살이 큰 힘으로 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취될 수 있다는 역설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 씨앗의 이론 / 42p –

 

현대인은 농장까지도 공장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집단농장이라는 것이다. 획일적인 농사일에는 농사를 짓는 그 기쁨이나 애정이 소멸되어버리기 때문에 생산성이 저하되고 만다. 소련은 전 농토가 집단농장으로 되어 있고 1% 정도만이 사경농지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곡물 전 생산량의 30%가 이 1%의 사경농에서 생겨난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농산품은 공산품과 달리 ‘애정을 가진 노동’, ‘놀이를 지닌 작업’에서만 가능하다는 증거다.
‘일’과 ‘놀이’를 하나가 되게 하는 것, 그 간극을 좁혀가는 것, 이것이 현대산업문명에의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 일과 놀이의 문화 / 64p –

 

[…]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그리고 직업이나 노동의 성질에 따라서 인간의 기능과 목적은 수시로 변한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하나의 의미와 목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며, 그렇다고 무의미하게 내던져진 돌멩이 같은 사물도 아니다. 그러한 존재와는 구별되는 ‘인간존재’인 것이다. 
스스로 욕망을 갖고 끝없이 그 용도를 변경하고 있는 기계이며 어떤 의미를 향해서 끝없이 움직이고 있는 돌멩이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인의 위기는 일할 때가 아니라 일을 멈출 때 생긴다. 자기가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그 시간인 것이다. 퇴근시간이 되면 우리는 회사의 의자에서, 서류에서 놓여난다. 우리를 붙들고 있던 것들, 끝없이 명령하던 것들이 멈추게 되는 것이다. 기계는, 모든 도구들은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자동적으로 재빨리 사물성을 회복한다. 그러기 때문에 방패나 칼은 싸울 때에만 무기일 뿐, 평화로울 때에는 조각과 마찬가지로 벽의 장식물이 되는 것이다. 
[…]
도구처럼 일할 때에는 어느 한 구석에 숨어 있던 내가 오후 6시나 7시가 되면 흰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고 짐승처럼 숨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 타자에 의해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나’, 피를 나눈 형제로도 마음을 함께하는 연인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그 영혼. 그것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구로서의 ‘나’를 그대로 연장시켜가려고 하는 것이다. 
– 벽돌문화 속의 개성 / 74~75p –

 

근대의 자아라는 것은 너와 나를 쪼개는 데서부터 싹튼 것이지만 앞으로 올 시대는 외로운 자아가 타자와 융합하는 실존적 고통 위에서 열리게 될 것이다. 
– 젓가락문화 / 87p –

 

사람들은 흔히 시작을 원인으로 생각하고 끝을 그 결과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그것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끝’은 언제나 시작하는 그 순간 속에 있다는 주장이다.
 대수로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지만 되씹어볼수록 많은 의미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겠는가? 끝이 없다면 시작이란 말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라도 끝이라는 생각 없이 시작이란 말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 시작과 끝이 있는 삶 / 105p –

 

눈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보지 않으면 그만이고 보려는 의지가 없으면 그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귀는 모든 것을 그냥 받아들인다.
이 수동성이 때로는 몰비판적인 비극의 씨앗이 되었으나, 그러나 한편으로 영혼을 정화하고 감정의 깊이를 닦는 슬기를 낳기도 한 것이다.
– 귀의 문화와 눈의 문화 / 127p –

 

어디엔가 친절이 남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친절을 받아들일 만한 마음은 아무 곳에도 없는 것이다.
이제 대가 없는 친절이란 의심과 경계를 살 뿐이다. 도리어 불안과 공포를 준다. 무상의 시대는 지나가고 만 것이다. 남에게 친절하지 않은 것이 도리어 친절이라는 세상인 것을 그날 밤 그 학생도 알았을 것이다.
– 친절 무용론 / 143p –

 

뿌리-줄기-가지. 이것이 우리 역사며 핏줄의 문화다. 한국인은 음식만 채식을 한 것이 아니라, 집만 나무로 지은 것이 아니라, 그 사고까지도 식물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나무와 인간의 결합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말 속에 이렇게 직접 얽혀 있는 예는 그리 흔치 않다.
 나무는 생명의 조화를 나타내는 극치다. 뿌리는 땅을 향해 하강하고 가지는 하늘을 향해 상승한다. 뿌리는 물을 찾고 가지는 빛을 구한다.
 ‘하늘과 땅이’, ‘상승과 하강’이, ‘불과 물’이 말하자면 온갖 반대어가 나무에서만은 갈등이 아니라 조용한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된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아기’를 원래의 뜻대로 ‘가지’로만 생각한다 해도 우리의 사회는 훨씬 더 밝아질 수 있다.
 젊은 세대의 가지가 뿌리처럼 똑같이 뻗어 가지 않는다고 해서 누가 한탄할 것이다.
– 한국어로 본 한국인 ‘아기와 가지’ / 181p –  

 

우리가 글을 쓸 때면 글의 근원적인 뜻대로만 쓰면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가 있다. 미끈미끈한 볼펜으로 글을 쓸망정 그것이 긁는 행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인들이 바가지를 긁듯이 문사(文士)도 문자로써 긁는다. 가려운 데를 긁어주어야 한다. 부정이나 불의를 박박 긁어야 글은 시원한 것이 된다. 
 그리고 또 글은 그리움을 나타내야 한다. 현재에 없는 것을 찾는 것이 그리움이다. 사라진 과거거나 앞으로 올 미래…… 언제나 ‘그리운 것’과 ‘그리는 것[憧憬]은 눈앞에 부재하는 것이다. 
 글은 바로 그 부재의 것을 현존케 하는 힘이다. 글은 긁는 것이며 문자로 쓴 그림이며 과거의 그리움과 미래를 그리는 행위다.
– 한국어로 본 한국인 ‘글과 긁다’ / 181p –

 

지성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지성은 퀴즈를 풀듯이 사물의 수수께끼, 생의 질서, 자신의 행동을 따져가는 일이다. ‘왜?’ 라는 문을 따는 힘, 그 열쇠, 그것이 지성의 기능이다. 지성을 길러낸다는 학교에서마저 우리는 ‘어쨌든’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는 것이다. 
– 한국어로 본 한국인 ‘지성은 퀴즈를 풀듯이’ / 199p –

 

추상적으로만 말해서는 안 된다. 대체 어쨌든과 싸워 지성의 숨구멍을 트이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로 우리는 결론을 서두르지 말자는 것이다. 성급하고 안이하게 결론을 내리려고 하기 때문에 어쨌든이란 말이 판을 치는 것이다. 그것이 지름길이 아니어도 좋다. […]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어떠한 연유로 해서 우리는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일까? 지성의 훈련은 바로 그 과정의 모색에 있다고 할 것이다. 
 둘째로는 ‘어쨌든’ 대신에 ‘왜’라는 말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항상 의문을 갖는 생활, 의문이 중시되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습관이다. 지성은 ‘회의의 씨앗’이라고도 한다. 맹목이야말로 지성의 적이며 지성의 상장(喪章)이다. 
‘왜?’ 행동하기 이전에, 복종하기 이전에, 동의하기 이전에, 왜라는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로 폭력을 거절할 줄 아는 용기야말로 어쨌든을 꺾고 지성이 승리하는, 지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결론이다. […] 지성이 잠들어 있는 곳에 폭력의 어둠이 온다. ‘그것이 아니다’, ‘그것이 옳다’ 부단히 자기 자신을 현시(顯示)해 나아가기 위해선 순간순간을 싸늘한 결단으로 이어가야 할 것이다.
– 한국어로 본 한국인 ‘어쨌든의 판정승’ / 201~202p –
 

사람들은 어린애들처럼 기쁜 일이 생기면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려고들 한다. 
재물이나 사랑을 얻은 자리에서는 빨리 도망쳐야 된다고 믿고 있다. 훔친 물건은 그 현장에서 멀리 떠나야만 완전히 자기 소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대체로 뜻밖에 기쁜 일이 닥쳐왔을 때는 그것이 훔친 물건이나 혹은 다시 빼앗기고 말 물건처럼 여긴다.
우리는 그만큼 기쁨에 익숙해 있지 않다. 그러나 슬픔은 대개가 다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히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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