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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살은 최소한의 애정이 존재할 때 가능한 것

2015/04/01

읽고 싶은 이어령을 읽고 있다.
라임 좋네. 
엄살보다는 공갈이 통하는 사회 라는 제목의 짧은 글에서 멈췄다. 

이제 어지간한 엄살은 사회에, 뭇 다른 이들에게 귓구녕 근처에도 닿지 않는다는 표현에 격하게 공감했다. 그보다는 공갈의 길이 빠를 것 이라는 대목에서도. 그들에게 엄살을 부리자니 깨알이라도 있을만한 애정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애초부터 형성되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지. 

엄살이라는 단어는 뭔가 의지가 충분히 느껴진다.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걸 알면서 부리는 나 좀 알아줘요, 나 좀 봐줘요 병. 
이럴 때 오구오구 그래꾸나, 형성된 이해관계 속에서 한 번 돌아봐 주는 이가 있다면 엄살을 부리면서도 내심 뒤에서 장전을 하고 있을테지만. 개무시 당하는 순간 그래 너는 병신이야 로 낙인찍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함. 사실 부리는 사람 입장에서도 상대방에게 어떤 반응을 받을지 어느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는 쪽에 한 표. 그게 엄살인지 실제 능력인지 판가름 될 수도 있으니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려가야 하겠다. 

 

하. 뭐야 벌써 4월. 

 

오늘도 역시 서울대 스벅엔 학구열 높으신 분들이 책을 한더미 쌓아놓고 열심 공기를 배출 중. 
생각해보니 개강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분들은 이렇게 날 좋은 날에 여기 박혀서 책과 씨름하시는 지.
가끔은 고갤 들어 창 밖의 하늘을 보.. 그래 여긴 북향이라 해도 들지 않고 고갤 들어봤자 보이는 건 맞은 편 오피스텔이구나. 공부하기 딱 좋은 곳이었어. 

잘 하는 사람으로 각인된 사람들에게 엄살은 공갈보다 힘든 일이겠지?
알아차려 줄 이 많지 않을 것 같으니. 

힘내세요. 
알아주던, 그렇지 않던 간에. 
스스로 당당하면 그걸로 됐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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