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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기

2022/02/11

평화로운 오후에 갑자기 울리는 유치원 선생님 전화는
심장박동을 단번에 끌어올려 오만 상상을 펼치는 스펙타클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뭐지 애가 다쳤나 아픈가 두근두근 마음 안고 여보세요오오 하이톤으로 시작하니
20대 특유의 명랑한 목소리가 기분좋게 울려 퍼진다.

의례 하는 2학기 상담이라고 하셨다. (지금 6세반 올라가기 한 달 전인데요..)
친구들과 놀기도 잘 놀고 정리도 잘하고 규칙을 이해하고 수업도 잘 따라오고 등등
좋은 말만 해 주시다가 툭 던지시는 한 마디.

어머니, 혹시 집에서 밥을 먹여주시나요?

학기 초엔 안그랬는데 점점 식사 시간에 집중을 못하더니
급기야 지금은 가만히 앉아서 다른 아이들이 밥먹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치워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선생님께 도와달라 하고 두세번 억지로 먹고 만다는 이야기.

아니 집에서는 고봉밥을 먹고 입이 쉴 새 없이 먹을 것을 달고 다니는데..
점심을 먹는둥 마는둥 하니 그런거였나
당황하는 내색을 보이니 선생님은 여러 방법을 써봐도 나아지긴 커녕 더 안먹고 있어 걱정되는 마음에 전화주셨다고 한다.

솔직히 6세부터는 혼자 밥먹자고 서로 약속했었는데
지키지 않은건 나였던 것 같다.
국이 뜨거워서, 젓가락질이 서툴러서, 나물도 골고루 숟가락에 얹었음 해서
밥먹는 애 옆에 앉아 훈수를 두며 거들던 것이 지금은 먹여주는 것과 다를 것 없기 때문에.

근데 유치원에서는 그렇게 먹지 않는다고 먹여주지 않을텐데 왜지?
가만 들어보니 주환이는 친구들이 밥 다 먹는 시간을 알고있다고 한다.
누구는 7에 다 먹고요 누구는 10에 다 먹고 누구는 3에 다 먹었어요!
지 밥상은 관심도 없고 친구와 시계를 번갈아가며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하기가 괴롭..

버티기 작전이군.
먹기 싫은 반찬이나 생소한 것이 나오면 일단 안먹고 투쟁.
그러다보면 식사 시간을 정리해야 하는 선생님이 와서 사정사정 하여 한두번 억지로 먹어주고 끝.
아예 손을 대지 않은 상태에서 먹어주고 끝낸거니 잘했다는 말을 듣게된다.

스스로 해보려는 마음은 줄어들고
시간이, 상황이 끝날때까지 기다리면 되더라
배도 고프고 아쉽지만 먹기 싫고 하기 싫은 것 피해갈 수 있으니 좋더라.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선 터지듯 새고 있었군..

여기에 나도 일조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다.
요 잔꾀 어린이에게 어떻게 말해줄까 고민하는 통에 하루가 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