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모든 것이 은밀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 좋은 인상 종일 비가 오다 말다 하여 온 우주의 습기가 피부로 들어찬 기분이었다. 운동 후 안 그래도 땀에 젖은 몸을 끌고 언덕을 오르는데 익숙하게 코를 찌르는 기운이 언덕 끝까지 없어지지 않아 앞을 보니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가 줄...
- 층간소음 안녕하세요. 1301호 입니다. 갑자기 올라가서 많이 놀라셨지요. 저희 가족은 지난 1년간 낮, 밤, 새벽마다 울리는 ‘쿵, 쿵’ 소리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무조건 조용히 해 달라는 것...
- 두드러기 눈이 오고 세상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던 날부터 이주 정도 주환이 얼굴, 몸에 작은 두드러기가 올라왔었다. 보습을 해도 좋아지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알레르기 같다고 해서 약을 먹이니 말끔히 없어졌다. 온도, 습도, 먼지와 ...
- 낮잠 토요일 한낮 오후의 낮잠이었다. 각자 앉은 곳에서 옆으로 뒤로 기대어 이야기하고 훌쩍거리다 어느새 낮은 코골이 소리만 났다. 그새 아주 짧은 꿈을 꾼 것 같다. 모두 무채색인 공간에 상 가운데 놓인 된장찌개만 선명히 끓고 ...
- 잔소리 주환이는 요즘 확실히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놀랄 만큼 늘었다. 언제 이렇게 커서는. 더 신경 써서 말해야지 의식하지만 종일 붙어있다 보면 그게 참 어렵고 어렵다. 자기 전에 갑자기 궁금해져서 물어봤다. 주환아, 엄마가...
- 1월 1일 근하신년, 삼가 새해를 축하합니다. 갑자기 새로운 사람이 되리라 헛된 다짐을 해도 심신과 환경을 다시 정비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날이다. 누군가 뜬금없는 선포를 하더라도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난 ...
- 평범한 하루 일이든 뭐든 날 갉아먹는 시기를 겪을 때 가장 돌아가고 싶은 날은 평범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날이다. 우리 집 알람 주환이가 여느 때와 같이 나를 깨우고 자연스럽게 주방에서 계란말이와 소시지를 굽고 어떤 옷을 입는 게 좋...
- 7개월 만에 글을 쓴다. 겨울쯤이면 괜찮겠지 기대를 걸었던 코로나는 보란 듯 등을 돌려 매일을 살 떨리게 하고 그런 코로나를 비웃듯 산으로 바다로 다니는 사람들은 치가 떨리고. 매일 걱정과 불안을 품고 사는 것에 익숙해졌다. 오늘 무...
- 당근이세요? 최근 한 달동안 당근에 빠져있었다. 가족 외 사람에게 ‘당근이세요?’ 이 말을 가장 많이 한 것 같다. 처음엔 이게 뭐라고 너무 긴장되고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걸지 걱정도 됐는데 근처에 가니 내가 만날 사...
- 넘겨 짚기 너는 애가 책을 그렇게나 읽으면서 엄마 마음 하나 몰라주냐? 전혀 개연성 없는 대화 흐름에 받아치질 못하고 침묵했던 것 같다. 그 때 엄마가 무엇 때문에 나한테 그렇게 화를 냈는지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저 말은...
- 이층집 이름은 탐라 였다. 탐나 였나? 탐라도의 탐라인지 탐나다의 탐나인지 아직도 헛갈리지만, 어린 마음에도 이름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유치원을 다니던 때니 5살쯤 이었던 것 같고, 이층집 아이 탐라는 나보다 한 살 위였다. 화...
- 샤프심 먹는 친구 정확하진 않지만 8, 9살 정도였던 것 같다. 학교 친구는 아닌 것 같고 골목에서 놀던 친구인데 어쩌다 집에 같이 가게 되었다. 우리 집은 해가 들지도 않는 반지하라 남의 집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 얘기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내 ...
- 엄카 주환이랑 같이 다니다보면 계산할 때 애 손에 카드를 쥐어주게 된다. 점원 분이 한 번 웃으시는 것도 보기 좋고, 이게 뭐라고 자기가 뿌듯한 일을 한 마냥 싱글벙글한 주환이도 보기 좋고. 우리 엄마는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텐데...
- 아침 사과 우리 집은 아침마다 늘 사과를 먹었다. 엄마가 어느 방송에서 사과는 껍질까지, 아침에 먹어야 좋다는 걸 보고 난 후부터였다. 세 번째 직장을 다닐 때였으니 스물여섯 이었나. 1분이 아쉬운 아침은 늘 정신없고 머리도 못 말려...
- 눈물 그놈의 눈물 대체 나도 모르게 시도때도 없이 흐르는 눈물은 어떻게 잠글 수 있는건지. 평소랑 똑같은 하루인데 어떤 날은 세수하다가도 자다가도 그냥 길을 걷다가도 눈에서 물이 나온다. 오빠는 내가 울면 항상 묻는다. 아니 도대체 어떤 ...
- 꽁꽁꽁꽁 꽁꽁꽁꽁 꽁꽁꽁꽁 주렁주렁 열렸네요 꽁꽁꽁꽁 꽁꽁꽁꽁 얼어버렸죠 거꾸로 지붕 밑에 매달려 쭉쭉 자랐어요 레아가 윙윙윙윙 날다가 머리에 꽁 부딪혔네 꽁꽁꽁꽁 길쭉길쭉 고드름 금요일마다 문화센터에 간다. 이제 4...
- 사랑한다는 흔한 말 사랑한다. 사랑해. 사랑하는. 편지나 문자에서는 곧잘 쓰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잘 꺼내지 못하는 말이다. 얼마 전에 주환이랑 놀다가 나를 보고 활짝 웃는 모습에 얼굴을 꼭 감싸고 사랑해 주환아. 말했다. 근데 순간 내가 이 ...
- 당연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 예상은 했지만. 인스타고 블로그고 뭐고 내가 없고 주환이 얘기가 그득하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주환이가 곧 내 이야기가 되는 시점이 온거라고 생각하면 좋은데. 자기 전 사진첩을 보다가도, 검색 내역이나 앱 실행 내역을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