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
가쿠다미쓰요 저 / 권남희 옮김
사람 하나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쯤 간단하지 않을까.
프롤로그부터 긴장감에 심장이 쫄깃했다.
내용이 야한 관계로 이번 책은 줄 수 없다는 이모의 메시지를 받은 것이 이유인지도.
이모 미안해 사실 난 이 책이 나오자마자 사서 휘리릭 단숨에 들이켰어. 혹시나 들킬까 노심초사하는 feat으로.
평범한 주부에게 일어나는 드라마틱한 전개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무엇보다 실화라는 점에서 책장을 넘기는 손이 빨라졌다.
걷잡을 수 없는 거액의 공금 횡령 이야기.
나?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날마다 전 날을 따라하는 것 같아.
/ 098p
오늘이 어제였고 내일은 오늘인 리카에게 찾아온 어제와 오늘이 다른 나날들.
시작은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였다.
5만 엔 이상이 들어있다고 생각한 지갑엔 몇천엔이 있었고 순간 아무 거리낌 없이 고객에게 받은 현금봉투를 건드린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망설임도 없었다. 점원이 그걸 들고 계산대로 간 뒤, 리카는 그제야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래도 신기하게 죄책감은 없었다. 역에 은행 현금자동입출금기가 있다. 돌아가는 길에 5만 엔을 찾아서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된다고만 생각했다.
/130p
원래대로 돌려놓는 일은 아마 살면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이 아닐까 싶다.
내면의 목소리가 점차 실제 행동으로 변해가고 그런 과정에서 만난 고타는 리카에게 탈출구 였을까 계속 자신을 갉아먹는 무엇이었을까.
만약에 아이 갖기를 진지하게 생각했더라면. 만약에 마사후미와 그런 얘기를 했더라면. 만약에 타운지의 면접에 붙었더라면. 만약에 나가쓰타에 집을 사지 않았더라면. 아니, 만약에 그 여름날, 부족한 5만 엔을 고객의 봉투에서 꺼내지 않았더라면.
리카는 무수한 ‘만약’의 끝에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거야’라는 생각을 계속했지만, 그러나 그 몇 개의 ‘만약’을 선택했다고 해도 ‘이렇게’ 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망연해지다가 이어서 천천히 소름이 돋았다.
/185p
돈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어째선지 보이지 않게 된다.
없으면 항상 돈을 생각하지만, 많이 있으면 있는 게 당연해진다. 100만 엔 있으면 그것은 1만 엔이 100장 모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 처음부터 있는, 무슨 덩어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은 부모에게 보호받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그것을 누린다.
298p
수많은 만약을 그려보더라도 결국은 지금 이 자리의 자신에게 웃음이 난다.
일어날 일은 언젠가 일어나고 사람은 그것을 지켜내려고 애쓰다 막바지에 이르러 진정한 자신을 보게 되어버리니.
그릇된 행동을 감추려 할수록 리카에겐 그보다 더 큰, 가림막이 필요했다.
결국엔 범죄 행위라는 사실도 망각한 채 마술에 걸린 듯 자연스럽게 다음, 그 다음 단계를 밟아 나가며 지우려고 애쓴다.
그러나, 하고 리카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강을 건너버린게 아닐까. 이곳에 이렇게 앉아 있는 자신이 이미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모습이 아닌가.
만약 고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까, 하고 리카는 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니, 이렇게 된 것은 고타를 만나서라고 생각할 수 없다.
…(중략)
가정은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무수히 흩어져갔지만, 하지만 어떤 가정을 해도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342p
모든 것은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고타는 그 모든 것의 중심에서 나가버렸다.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 된 것일까.
안타까움, 긴장감이 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중간에 덮을 수 없어 밤새 읽어내려갔던 종이달.
이상한 건 리카를 당당하게 미워할 수 없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