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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2012/08/10

무라카미 하루키 / 권남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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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하루키. 간만에 이모 번역책. 간만에 에세이.
이모가 있어 게으를 찰나에 책폭식을 하는 감격을 누릴 수 있는 것 같다.

20살 언저리에 읽었던 하루키와 지금 읽는 하루키는 분명 다른 느낌이다. 솔직히 그땐 허세 하루키였. 캬캭.
제목이 무슨 의미일까 ? 을 가졌는데. 걍 에세이 단편 중 2개의 제목을 나열한 것.
어제 받아서 새벽까지 넘겨보다, 한 번에 다 읽기 아까워서 좀 남겨뒀다.
잡지에 연재했던 무라카미 라디오 한 해 분을 모은 거여서 신나게 읽혔다. 해서, 후기는 하루키 아자씨가 책 앞장에 뽑아 놓은 단편 하나를 쓰는걸로.

채소의 기분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이라는 영화에서 노인으로 분한 앤서니 홉킨스가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 없다”라는 말을 했다.
한참 전에 본 영화여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런 취지의 발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골동품급 오토바이 ‘인디언’을 개조해 시속300km를 내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심히 펑키한 노인으로 그 말은 이웃집 남자아이에게 한 것이다. 너무나 멋진 대사가 아닌가. 그러나 얘기는 거기서 깔끔하게 끝나지 않는다.
남자아이가 되묻는다. “그런데 채소라면 어떤 채소 말이에요?” 돌발질문을 받은 노인은 당황하여 “글쎄 어떤 채소일까. 그렇지,으음, 뭐 양배추 같은 거려나?” 하고 얼버무려 얘기는 흐지부지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린다.
나는 대체로 이런 용두사미식의 대화를 좋아해서, 이 영화에 호감이 생겼다.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에서깔끔하게 끝나면 확실히 멋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면 채소가 시시한 존재가 돼버린다. 그렇지 않은가? (살짝 중략) 하루키 아자씨가 양배추를 요리하는 걸 생각하는 뭐 그런 대목. 재밌지만 중략.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라고 누군가 단호히 말하면 무심결에 “그런가?” 하게 될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채소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채소마다 마음이 있고 사정이 있다. 하나 하나의 채소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인간으로서의 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무심코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그럴 때도 있다). 뭔가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우집는 건 좋지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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