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방학을 맞이하여 어린이의 친구 모녀와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가다 엎어지고 일어나다 엎어지고 할 때 어린이 박물관에 갔던 것 같은데
혼자 유유히 다녀온 적이 언제였던가.. 떠올리려는데 자꾸 시간이 겹쳐 또렷하지가 않다.
어린이 박물관은 예약제로 운영하여 1시간 20분 정도 이용할 수 있다.
고맙게도 친구가 이곳과 VR체험을 예약해 주어 어린이들이 먼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VR 체험은 10분 정도 한 것 같은데
직접 문무왕이 되어 활도 쏴보고 용이 되어 승천하는 스토리로 아주 실감 나게 잘 즐기는 모습에 한참 웃었다.
근데, 내가 오지 않은 동안 박물관이 리뉴얼을 한 건가.
여기 이렇게 괜찮은 곳이었나.
안팎으로 좋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마음에 찼다.
마음 같아서는 3층까지 남김없이 보고 싶었지만
1학년 어린이들의 체력과 제한된 시간과
아직 잘 모르는 유물들을 뚫어져라 보고 읽는 어른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을 헤아려서 눈에 띄는 곳들만 다녀왔다.
여기 참 좋다. 또 오고 싶다. 종일 있으래도 난 할 수 있다. 의 몇 가지 말을 돌림노래처럼 읊으며
같이 간 친구 엄마와 나는 눈이 바빴다.
평일이고 이른 오후 시간이라 그런지
공간도 공기도 여유로워서 가는 곳마다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나도 초등학생 때 엄마의, 선생님의 손에 끌려 왔을 때는
대체 이 물건들이 나에게 무엇이 중요하다고 보라고 하는지 설명을 적으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릴 때 박물관의 기억은 어둡고 미로 같은 곳에 완전하지 않은 어딘가 부서지고 갈라진 물건들이 좌라락 늘어져 있어
마치 죽은 사람들의 공간에 산 사람들이 침입한 기분이 들어 어서 나가고 싶었다.
아, 지금의 박물관은 정말 놀랍다.
문화재를 보는 것은 물론 듣고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의 요소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고 디지털 영상의 수준도 매우 높다.
보고 싶었던 사유의 방을 들어갔을 때는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아이들도 동상이 되어 잠시 유물을 들여다볼 정도로 분위기를 잡아주었다.
가는 곳마다 보게 되고 읽으면 더 궁금해지는 유물과 역사의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쉬울 정도였는데
내가 왜 이러나, 사실 무엇을 보든 예전 교과서에서 봤던 것 외엔 초면인데 왜 이리 반갑고 신기하고 즐거운 것인가 진정하라. 되뇌었는데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나 여기 좋아하네.
게다가 무료다.
확실히 입장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읽은 <박물관을 쓰는 직업 (신지은 저)>책에서 저자의 에피소드 중 택시 기사님과 나누었던 대화에서 무료인 것을 알았다.
집만 가까웠다면 이 아름다운 곳을 마당 삼아 산책할텐데.
참, 책에서 저자가 소개했던 마성의 달항아리 ‘백자 달항아리’를 봤을 땐 너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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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항아리는 위아래를 따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그래서 항아리 가운데를 자세히 보면, 붙은 자리의 선이 있다.
구슬처럼 매끈하게 표면을 매만질 수도 있겠지만, 저렇게 적당히 흔적을 남겨준다.
저렇게 잘 보이는 자리에. 내게는 우리 도자기들의 그런 점이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지점이다.
…
조선시대로 가 이 항아리를 만든 사기장을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저것 좀 싹싹 다듬으면 어때요?” 그러면 “가마에서 잘 붙어 나왔으면 되었지 뭘 또” 하고 껄껄 웃고 가버릴까.
어쩌면 처음부터 하나로 만든 것보다 두 그릇이 한 그릇이 된 게 더 재미있지 않냐고 되물어 올 장난스런 이도 있지 않을까.
…
달항아리에는 두 팔을 펼친 품이 이제 막 맞닿은 순간을 바라보는 것 같은 조마조마한 설렘이 있다.
서로를 끌어당기거나 짓누르지 않고, 살며시 포개지는 천천한 모습.
각각이었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편안한 포옹. 달항아리의 이음매에는 언제나 그 어떤 로맨스보다도 애틋하고 우아한, 눈 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시작되고 있다.
– <박물관을 쓰는 직업(신지은 저)> / 마성의 달항아리 중 –
책에서 봐서 그런지 약간 어깨가 기운 듯한 달항아리가 친숙했다.
일을 할 때나 걸을때나 허리 펴라, 어깨좀 세워라 얘기를 하도 들어서 그런 것일지도.
디지털 실감 영상관에서 봤던 ‘강산무진도’는 온라인에서 다시 찾아보았다.
전체 공간을 영상으로 메워 마치 내가 그 안에 머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요일별로 영상이 달라지던데, 금강산에 오르다’ 영상을 보러 다시 가고 싶다.
지친 아이들에게 눈이 번쩍 떠질 케이크를 맛 보여주러 가는 동안 흐릿한 하늘에서 싸라기눈이 내렸다.
꽝꽝 언 거울못을 지나 깔깔 소리를 내며 뛰어가는 아이들이 이곳과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봄이 오면 여기 풀어놓자고 얘기하며 아쉬운 시간을 뒤로했다.
또 만납시다.
그땐 내 아주 여유롭게 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