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가. 딱 들어도 반감이 생기지 않는가.
보험 아줌마는 있고 보험 아저씨는 없던 시절 엄마는 잘 나가는 보험 아줌마였다.
입사 1년 만에 지점 퀸을 달고
명예의 전당에서 한복 차림에 본인 키 만한 트로피를 안고 왕관을 쓴 사진은
그 당시 우리 집 가보로 남을 역사였다.
반지하 집에서 어느 날부터 아빠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질 때쯤이었나.
어떻게 하지, 어떻게 도망가지, 안돼 그래 애들은 어떻게 해. 그럼 안 되는 거지.
교회도 나가보고 기타도 쳐 보고 인형 눈도 붙이며 견뎠지만
빠져나오지 않는 생각에 허우적대다 만난 보험이었다고 했다.
남한테 사탕 하나 팔아본 적 없는 엄마는
그때부터 아쉬운 소리를 입에 달고 화장을 하고 공부를 하는 보험 아줌마가 되었다.
막상 나가니 인사하기도 부끄러워서 판촉 사탕과 광고지가 잔뜩 담긴 가방을 안고
골목에서 한참 서성이다 집으로 모두 가져오기도 하고
설명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아서 애꿎은 물만 마시고 왔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결심이 선 날
그럴듯한 옷을 엄청 샀단다.
당장 저녁 차릴 돈도 얼마 없는데 그냥 샀단다.
자신감과 전재산을 입은 엄마는 시장부터 돌았다.
필요하지도 않은 이불부터 매일 먹는 반찬까지 구석구석 성실하게 돈을 쓰며 그들의 손에 명함과 사탕을 쥐어줬다.
처음엔 인사만 해도 보란 듯이 먼지를 털고 인상을 쓰던 상인들이
언니, 동생 하며 여기 앉아서 커피 마시고 가라고 잡은 손으로
펜을 잡아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순간이 오기까지.
깊이 패여 상처가 나고 도무지 채워지지 않을 것 같던 속에 부드러운 죽이 들어오는 것 같다고 했다.
보험 아줌마의 그 속을 누가 알까.
한 날은 검은콩을 가득 볶아와서 소분을 하길래 그걸 왜..? 물었더니
검은콩이 탈모에도 여자에게도 좋다며 사탕 대신 주는 거라고 했다.
남들과 달라야 내 명함 버리지 않는다고 이런저런 물품을 많이 사기도, 발품을 팔기도 했다.
그 넓은 시장을 두세바퀴 돌고 집에 와서 저녁을 하고 다시 판촉물을 만들고 계약서를 준비하고 전화를 하는 엄마가 안쓰러웠다.
아니다, 당시 어린애가 느낀 마음이 아닌 지금 내 마음일 거고.
아마 우리엄마 대단하다아아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초등학생인 나는 자주 엄마를 따라 다녔는데 명함 주며 옆에 있는 나 인사시키는 동안 한두 마디라도 더 할 수 있다고 했다.
엄마를 반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무서울 정도로 무시하는 사람들의 눈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그런 멸시를 받는 엄마를 보는 게 정말 싫었다.
그들에게 받은 무시와 불신이 쌓이는 동안에도 엄마는 무던히 노력했고 자기만의 방법을 찾았다.
멸시보다 무서운게 돈이라고 휴일도 없이 일하는 엄마에게 가장 좋은 건 계약 성사였다.
그렇게 퀸이 된 엄마는 진짜 보험 아줌마가 되었고
그 누가 뭐라해도 쉽게 푸슈슉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퀸은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학교끝나고 집에 왔는데
차 한 대 들어오기도 힘든 골목에 흰 색 액센트가 자리잡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퀸의 1호 차였다.
흰 장갑을 끼고 야무지게 허리를 세우고 퀸은 달렸다.
고객이 있는 곳이라면, 차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새벽이든 밤이든 정해진 시간은 없었다.
그저 고객이 부르는 시간만이 엄마에게 정해진 시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 혼자 무서운 적 없었냐는 질문에
이제야 말할 수 있다..의 느낌으로 몇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나쁜놈은 두가지 부류가 있다는 말로 시작했다.
계약한다고 불러놓고 딴 말만 하는 놈,
계약해놓고 돈 안내서 몇 번 내주었는데 절대 안갚는 놈.
그것들이 모두 놈 이라는 것에 대해 편견은 없으나 그냥 사실이 그렇다.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고속도로를 달려 산골에 위치한 고객 가게에 도착했는데
밥을 먹으며 이야기하자고 김치찌개 집으로 가자 했단다.
당시 그 사람은 트럭을, 엄마는 본인 차로 뒤따라갔는데
아무리 가도 식당은 없고 주변에 사람도 없고
자꾸 길을 돌고 유턴을 하고 그러다 산길 같은 곳을 올라가더니 차를 세웠단다.
이미 어스름한 겨울 저녁이었고
여자의 직감으로 여기서 내리면 죽겠구나 싶어 그대로 차를 돌려 서울로 왔다는 이야기.
이번 달만 내주면 정말 모두 갚겠다는 말만 하던 고객이
밀린 돈 주겠다며 지방으로 내려오라는 연락에 해가 뜨기도 전에 출발한 날은
자꾸 약속장소를 바꾸고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도 안되는 핑계로 시간을 지체하더니
결국엔 돈을 주는게 아니라 빌려달라는 말을 하더라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겪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비가 무섭도록 많이 와서 제발 사고만 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빌며 운전했다는 이야기.
이런 류의 이야기가 정리하면 한 트럭이다.
지금에야 보험 관련 업무를 하는 전문직의 청년들도 많고 사람들의 인식도 전과는 달라졌지만
2, 30년 전 보험아줌마가 겪고 묻은 일들이 보험 아저씨였다면 있을 수 있는 일들인가.
어떻게 그러고 몇십년을 일한거야? 물어본다.
새끼들 크는데 그럼 굶어? 그냥 눈 뜨면 나가는거야.
퀸의 희생으로 큰 부족함 없이 컸다.
부족함이 있더라도 묻어야 할 만큼의 희생이다.
엄마가 퇴사한 다음 날, 그러니까 회사에 이제 나가지 않아도 되던 날
이제 늘어지게 잘 수 있어 좋은데 잠을 오래 잘 수 없는 나이가 됐다며
씁쓸하게 웃으며 통화하던 목소리가 생각난다.
마이 퀸, 이제 좀 즐기면서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