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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마트에서 울다

2023/11/13

미셀의 엄마, 정미 씨의 투병 전과 아픔의 시기, 죽음에 이르기까지
딸로서 한 사람으로서 그녀와의 관계를 돌아보고 마주하고 추억한다.

엄마와 나의 관계를 돌아보면 과연 짧은 이야기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그 누구와의 관계보다 깊고 복잡하며 미묘하고 애착이 짙은 사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정의할 수 없는 사이로 가야 하는데
내 앞에서 천천히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보내는 엄마를 본다면 어떤 마음일지.
벌써부터 남은 흔적을 붙잡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하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여기에 있지만, 이번에는 온전히 내 자유의지로 돌아온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제 어둠 속으로 무작정 달아날 궁리를 하는 대신, 부디 어둠이 찾아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 135p

어린 방황의 시기에 엄마가 끌어당겨 앉혔다면
이제 미셀은 엄마에게로 스스로 걸어간다.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의 사이 정서에 불완전함을 느꼈던 미셀은
엄마와 함께했던 한국스러운 날, 맛, 느낌을 짙게 꺼내어보려 한다.
눈앞에서 고통스럽게 약해져 가는 엄마를 보며 지금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매일, 매시간 생각한다.
피터와의 결혼도 2주 만에 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늦기 전에, 엄마가 정신이 있을 때 해야 한다.
더..늦기 전에 할 수 있는 걸 해내야만 한다.

우리는 엄마가 죽기를 기다렸다. 마지막 며칠은 아득하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해온 내가, 이제는 엄마의 심장이 아직도 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 엄마가 그냥 굶어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미칠 것 같았다.  – 256p 

정미 씨의 죽음 전에는 엄마를 떠올리느라 힘들었다면
죽음의 순간과 이후에는 아빠가 너무 생각나서 괴로웠다.

입퇴원을 반복했던 시기와 그때마다 보이는 아빠의 무너지는 표정, 의욕 없는 빈 껍데기만 남은 눈.
그리고 어서 벗어나고 싶다고 눈으로 말하는 엄마의 태도까지.
요양원 이후 증세가 악화되어 모르핀 외에는 별다른 처방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혼자 일어나 화장실에 가려다 넘어져 이마가 찢어지는 일이 있었다.
의사는 그 시기에 혼자 걷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했지만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직후에 병원으로 옮겼고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아 여기까지구나.
아빠는 여기 이곳에서 당신의 삶을 지나쳐가겠구나.

말과 목소리를 잃고 보는 것을 닫아버리고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잠든
마치 저렇게 영원히 잠들어 버릴 듯한 침대 위의 아빠를 보면서 나는, 엄마는
아마도 아빠가 죽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그때의 아빠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때의 나는 정말로 그때를 기다렸던 걸까.

아기 신발 두 켤레를 발견했을 때는, 아무것도 버리질 못해 내게 그런 것까지 처리하게 만든 엄마가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신발은 완벽한 상태로 보존돼 있었다. 

두 켤레 다 너무 작아서 내 손바닥 안에 쏙 들어왔다. 나는 샌들 한 짝을 들고 눈물을 터뜨렸다. 이런 물건을 보관해뒀을 엄마 마음을 상상하면서. 엄마는 언젠가 자기 아기의 아기가, 자신은 절대 만나보지 못할 그 아기가 그 신을 신게 될 날을 생각하면서 이것들을 고이고이 싸뒀을 것이다.  – 313p

내게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가능한 한 바쁘게 지내고 싶었다. 몸을 최대한 바쁘게 놀려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댈 시간이 없도록, 피터와 내가 영영 유진을 떠날 때까지 남은 몇 달 동안 지속적으로 몰두할 일이 필요했다. 어쩌면 간호에 실패한 나 자신을 벌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니면 내게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려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 324p 

피터와 내가 여행 다닌 장소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고 싶어한 곳이었다.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 병원 격리 생활로 변해버리기 전에 엄마가 나를 데려가려 한 곳이었다. 
엄마가 나와 함께 만들려던 마지막 추억이고, 엄마가 나를 키우며 내가 사랑하도록 만든 것의 원천이고, 내가 기억했으면 하는 맛이고, 내가 절대 잊지 않았으면 하는 감정이었다. – 345p

 

미셀은 엄마가 떠난 후 기억을 더듬어 한국 요리를 하고 몸을 바쁘게 움직여 빈칸을 채운다.
H마트에서 엄마의 음식을 떠올리며 재료를 고르는 미셀은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추억하고 사랑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엄마의 나라이지만 누구보다 깊은 정서를 지님을 인정하고 자신의 방법대로 애도한다.

 

나는 아빠의 부재 이후 한동안 이름을, 존재를, 지금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흘러가듯이 두면 언젠가는 흐려지겠지 생각했다.
그러다 마주한 아빠의 서랍 속 물건들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고 그때 알았다.
이 감정은 절대 흐려지지 않음을, 진하고 더 진해져 쓰디쓴 감정이 될지언정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치웠던 사진을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고 엄마와 웃으며 아빠를 이야기하고
1년에 두어 번 숲에 찾아가 마음껏 울고 온다.

부재 이후의 삶을 살아가며 되뇌어보고 떠올리고
아빠의 삶을 정서를 이해하고 추억하고 사랑하며 지내보려 한다.

아빠도 있었을까 내가 절대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