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섬이 아니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세상이다.”
초반부를 읽을 땐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시니컬한 서점 주인과 상처받았지만 티 내지 않으려는 씩씩한 영업사원의 대화로
아, 이 둘은 나중에 엮이겠군 식의 단조로운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겼다.
각 이야기의 앞장에 나오는 책소개는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궁금해질 찰나,
가던 손을 멈추고 뒤로 돌아가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마야’가 등장하고부터 이야기는 생기 있게 윤이 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섬에서 서점을 하며 행복한 날들을 보내던 에이제이에게 불행은 갑자기 들이닥쳤다.
예고 없이 아내를 앗아간 사고로 냉소적이고, 내일 죽어도 무슨 상관이냐는 식의 삶을 살던 중
누군가 서점에 두고 간 여자아이를 만난다.
잃어버린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부터 에이제이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하루만 지내고 돌려보내려 했는데, 마야의 애착 인형 엘모까지 마음에 들어오게 되어버린다.
에이제이는 분홍색 파티용 드레스를 입은 마야를 보고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참을 수 없는 기운이 속에서 간지럽게 부글거리는 느낌이었다.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거나 벽이라도 쾅 치고 싶었다. 술에 취한 기분, 아니면 적어도 탄산이 들어간 기분이었다. 미치겠군. 처음엔 이런 게 행복인가 보다 했다가, 이내 이건 사랑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빌어먹을 사랑,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감정인가. 그것은 죽도록 술 마시고 장사를 말아먹겠다는 그의 계획을 정면으로 가로막았다.
제일 짜증 나는 것은, 사람이 뭔가 하나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결국 전부 다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는 점이다. 제일 짜증 나는 것은, 심지어 엘모까지 좋아졌다는 점이다. – 98p
마야를 입양하기로 결심하고 시간이 흐르자 동네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에이제이와 가까이하는 것이 불편해서 서점에 발길도 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마야의 존재가 궁금하고, 에이제이의 꼴을 구경하고 싶고, 참견하고 싶어 기웃거린다.
여긴 어딘가? 서점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책을 보게 되고 사게 되고
급기야 북클럽을 만들자는 의견까지 나온다.
마을 사람들이 서점을 가까이하게 되는 전개에서는 그 상황이 상상되어 웃음이 났다.
램비어스는 서점에 오자마자 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게 말이야, 처음엔 그다지 마음에 안 들었는데, 점점 좋아지더라니까, 와.”.. 저기, 에이제이, 쭉 생각해 봤는데, 우리 둘이 경찰관들을 위한 북클럽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 95p
에이제이는 딸 마야에게, 마야는 아빠 에이제이에게 길들여지고 친밀해진다.
책과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는 귀여운 유년기의 이야기들도 충분히 마음이 차오르는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역시 에이제이는 책 초반부의 ‘씩씩한 영업사원’, 어밀리아(에이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순간이 아닌 취향과 존중의 시간들로 꽉꽉 채운 시간들.
에이제이가 청혼하며 했던 말에 여운이 남는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곤..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곤, 우린 함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에요, 맹세코. 나는 내가 읽는 책을 당신도 같이 읽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밀리아가 그 책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내 아내가 되어 주세요. 당신에게 책과 대화와 나의 온 심장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에이미. – 193p
에이미와 마야와 함께 하는 결혼 생활은 평범하지만 반짝인다.
마야의 사춘기를 그저 귀엽게 바라보는 에이제이는 글짓기 대회에 출품한 마야의 글솜씨를 극찬하기도 하는 극성 아빠가 되었다.
그와중에 마야의 친부가 밝혀지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반전을 불러오는 요소라 책에서 직접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옮겨오지 않았다.
마야와 에이미, 에이제이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전개되면 안 되는 걸까.
이 역시 처음에 언급된 바 있어 앞으로 수루룩 넘어갔다 왔다.
에이제이의 어떤 증상이 발현되는 구간.
희귀 암에 걸려 수술하게 되는 에이제이의 시간들을 쓸어 넘기며 마음이 너무 착잡했다.
마야 이전의 삶, 어밀리아 이전의 삶을 떠올리게 할 만큼의 힘든 시간들을 보내는 에이제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음에도 마야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다.
수술 후, 그는 한 달 코스의 방사선 치료를 위해 격리병동으로 옮겨졌다. 방사선 때문에 면역체계가 무너져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니콜의 사망 이후 기간까지 포함해서, 이토록 외로웠던 적이 없었다. 술에 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방사선을 쬔 그의 위가 알코올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마야 이전의 삶, 어밀리아 이전의 삶이 이랬다. 인간은 홀로 된 섬이 아니다. 아니 적어도, 인간은 홀로 된 섬으로 있는 게 최상은 아니다. – 296p
아주 심플한 거야, 그는 생각한다. 마야, 그는 말하고 싶다, 이젠 다 알아…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우리는 혼자라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내 인생은 이 책들 안에 있어, 그는 마야에게 말하고 싶다. 이 책들을 읽으면 내 마음을 알 거야.
우리는 딱 장편소설은 아니야. 우리는 딱 단편소설은 아니야. 그러고 보니 그의 인생이 그 말과 가장 가까운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단편집이야. – 301p
그래, 아빠. 아빠란 건 바로 나지. 내가 아빠가 됐지. 마야의 아버지. 마야의 아빠. 아빠. 이 얼마나 작고도 큰 말인가. 이 얼마나 놀라운 말이요 세계인가! 눈물이 났다. 가슴은 너무 벅찬데 그걸 풀어놓을 말이 없다. 난 말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 그는 생각한다. 말은 감정을 덜 느끼게 해 주지. – 302p
우리는 우리가 수집하고, 습득하고, 읽은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여기 있는 한, 그저 사랑이야.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그런 것들이 진정 계속 살아남는 거라고 생각해. – 305p
각 이야기의 앞장에 있던 책소개는 에이제이가 마야에게 쓴 글이다.
13권의 단편집을 소개하며 마야에게 전하는 말을 덧붙인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어라 말인가.
누군가에게 책을 소개한다는 것은, 책을 읽으며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것은, 진심이 아니면 할 수 없다.
마음에 사랑이 가득 차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섬과 육지, 마을 사람들과 에이제이, 마야 그리고 에이미와 에이제이를 연결하는 것은 서점이고 책이었다.
에이제이의 서점은 계속되고 있다.
그의 삶이 영원에서 계속되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