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지금껏 살면서 가장 여유롭고 행복한 때가 아닌가 싶다.
라고 너무 섣부른 판단을 하기엔 훗날에 이보다 더 좋은 날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대충 얼버무리고.
이불 덮고 있던 가을이 발차기 하며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정말 하루 아침에 바람이 가벼워졌다.
여름 내 괴롭던 습습한 기운과 수건에서 나던 반갑지 않은 고온다습 냄새도 앞으로 1년 후에나 다시 만날 수 있겄지.
이전엔 시간을 다투며 지내던 기억이 무거운데 지금은 하루 혹은 일주일 단위로 천천히 산다.
천천히 느리게 살면 많은 걸 보고 생각할 수 있다.
늘 보던 자리에서 보이던 구름이 다른 모양으로 지나가는 것도
구우가 왕성한 기운일 때 졸릴 때 배고플 때 물 먹고 싶을 때 내 똥 쌌으니 언능 치워뿌라 할 때 눈빛이 다른 것도
책장에 다 읽지 못한 책은 어떤 것이 있는지. 제목만 스치고도 아 이런 내용의 책은 참 좋았지 생각하는 것도
엄마는 뭐하지 아빠는 오빠는 이모는… 직접 연락하진 않더라도 마음으로 가족 친지 한명씩 떠올리는 것도
캘린더를 펼쳐 놓고 지나치게 현실적인 스케줄을 상상하거나 말로 하기엔 쑥쓰러운 우리의 계획을 적는 것도
나는 오늘 몇 살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지내면 좋을지도
시를 다투며 지낼 때엔 감히 출입통제하던 버거운 것들도 언제든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레벨이 약한 공격도 쉽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고.
스트레스가 너무 심한 탓에 병을 달고 살았던 때 몸은 힘들었지만 오히려 정신적으로 강했던 것 같다.
그래! 999의 수치도 견뎠는데 1 너까짓 내 오늘 받아 주겠어! 다드르와이씨 의 심정으로.
지금은 없는 형편에 얕게 치고 들어오는 0.5의 스트레스도 힘들다.
내가 언제 쓴 걸 그대로 삼켰었나 싶을 정도로 이제는 입에 닿기도 전에 에푸푸푸 즉각 반응.
누구 때문에 이런 상황 때문에 뭣같은 것 때문에 때문에 때문에. 에서 찾았던 이유는 진짜가 아니었다.
보지 못한걸 보고 생각하지 못했던 걸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집중하며 살게 되면 겉으로의 이유는 없어진다.
어쨌거나 내가 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나로부터 시작되니.
하루를 전쟁같이 살더라도 스스로를 보호하는 안전장비 정도는 챙길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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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를 너무 부렸나.
뒤통수가 따갑다.
누나 이시끼 너나 잘해라. 어디 전쟁나가나.
TV에서 꿀나오나 후딱 끄고 드가라.
아라따.
일하러 갈끼다. 가면 될꺼 아이가.
요즘 감시받는 기분이 든다 했더니만.
커피 한잔 땡기고 드갈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