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 중에서도 우유거품이 몽골하게 차 있는 커피콩 라떼를 좋아한다.
라떼 중에서도 바닐라 향이 적당히 첨가된 어린이맛 라떼를 즐겨 마신다.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책 중에서도 사색에 빠지게 하는 시집이나 인문학 장르를 골라 읽는다.
개인적으로 자기계발서나 시리즈물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한다.
음악 중에서도 발라드, 인디밴드, 영화OST만 골라 듣는다.
개인적으로 머리가 아픈 롹이나 들으면 잠이 쏟아지는 연주곡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에 커피, 책, 음악 좋아하는 사람은 차고 넘칠꺼다.
좋아하지만 내가 적은 조건과 하나도 맞지 않는 사람도 넘실거릴꺼다.
코드가 통한다는 표현은 나의 관심사와 얼추 비슷한 사람에게 자주 내던지는 말.
살다보면 주위에서 적잖이 나와 잘 맞는 또는 정말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된다.
누군가가 “난 이런게 참 좋더라. 난 저건 좀 싫더라.” 라는 말을 던질 때, 엇. 나도. 나도. 나도. 삼창하고, 괜히 말 한마디 더 붙여서 내 취향에 대한 동의를 더 끌어내고 싶은 마음.
나만 좋아하는 게 아니구나, 여기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반가움.
난 그대와 정 반대일세. 란 생각이 들게되면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이 하는 말엔 행동엔 별 신경도 안쓰고 저 사람은 나랑 다르니까 뭐. 하고 넘기는 마음. 교집합이 없으므로 나와 다른 사람의 집단에 넣어버린다.
개인의 취향은 참 말 그대로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취향이기에 맞추기도 어렵다.
어찌보면 취향도 ‘선택’의 일부인데,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니 그 설득의 과정이 이성적으로 논리적이지도 않고 감성적으로 별 공감이 안가기에 억지로 맞출 필요를 못 느끼는 듯.
그래서 타인의 취향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맞춘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 이해가 섞여 있는 문제이기도 하니까.
그렇다고 무작정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난 인정하기 싫고 받아치기 싫은 그 사람의 취향일지라도, 그 속엔 그 사람 개인의 사상과 가치관이 연결되어 내가 쉽게 무시하지 못하는 무게가 실려있을지도 모르니, 나와 다를 뿐 틀린게 아니라는 인정이 필요한 부분.
그 사람을 생각하면 동시패션으로 떠오르는 취향이 있다는 것.
‘자기다움’을 가진다는 건 참 중요한 것 같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다움을 지키면서 타인의 취향도 인정하는 깨어 있는 마인드.
너는 너, 나는 나 하는 시대적 발상은 결국 땅굴 파고 혼자 들어차 있어야 하는 상황만 만들 뿐.
넌 틀려, 내가 맞아 하는 망상 또한 시베리아에서 외로와 외로와 노래를 부를 외로움만 떠안을 판.
더불어 살려면, 그 속에서 자기다움을 지키려면
이해와 존중 배려가 뒤섞인 훈훈한 유전자를 기르고 닦아야 하는 것이 상책.
앞으로 나랑 똑같이 안먹는다고 쿠사리 주지 말아야지.
역시나 삼천포 결론.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