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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하루

2020/12/31

일이든 뭐든 날 갉아먹는 시기를 겪을 때 가장 돌아가고 싶은 날은 평범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날이다.

우리 집 알람 주환이가 여느 때와 같이 나를 깨우고
자연스럽게 주방에서 계란말이와 소시지를 굽고
어떤 옷을 입는 게 좋을지 약속된 실랑이 한 판 하고
오늘은 씽씽을 탈 건지 걸어갈 건지 얘기하며 신발을 신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두 손에 얼굴을 감싸 쥐고 사랑한다 말해주고
어린이집에 무사히 들어가는 걸 보고 씽씽을 들쳐 메고 집에 오는 아침의 시작.

문 활짝 열고 청소기 돌리면서 내 머리도 좀 돌리고
우리의 일터 골방에 불을 켜고 라디오 앱을 켠다.
커피 한 잔 내려서 앉아 메일을 확인하고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켜 보기도 하고.

한참 오빠가 밤을 새워서 일할 때는 이 방에 들어오기가 싫다.
너무 전투적인 공기로 가득하다고 해야 할까.
뭐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기분을 누를 수가 없어진다.
그래서 난 되도록이면 아침 10시 오후6 시의 업무 시간을 지켜 일하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두세 개로 분열되어 일해야 할 만큼 바쁠 때는 규칙 따위 소용 없지만.

업무 시간을 가득 채울 만큼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은 무겁지만 발걸음은 가볍게 입가엔 미소를 장착하며 거실로 기어나간다.
애정 하는 일본 영화를 보고 또 보고
냉동실에 묵혀 둔 치즈 케이크를 야금야금 먹으면서 입이 터지면 집에 있는 온갖 주전부리를 꺼낸다.

영화 한 편이 끝나갈 때쯤 우리 집 어린이가 집에 올 시간이므로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이 바빠진다.
꼭 데리러 가려면 화장실에 가고 싶고 조금 졸리고 치워야 할 게 보이고.

밤 새 일한 오빠가 다시 하루를 마주하는 시간이자
업무 퇴근과 동시에 내가 육아 출근을 하는 시간 우리 셋이 모이는 저녁이 되면
오늘도 우리 별 일 없이 셋이 모였구나, 참 다행이다 생각이 든다.

몇 개 더 놀고 잘 건지 질리지도 않는 약속을 하고 시간이 지나 소등.
오늘은 좀 짧은 이야기의 책을 골라오길 속으로 바라지만
역시나 목이 갈라질 만큼 내용이 많은 책을 네다섯 권 가져오는 주환이의 얼굴엔 장난끼가 가득하다.

아빠만 좋아 엄마는 안 좋아 얘기하는 애랑 등 돌리고 누워 있으면
내일은 덜 짜증 내야지 화내지 말아야지 소리 지르지 말아야지 실속 없는 다짐을 하게 된다.
아빠의 코골이가 시작되면 슬금슬금 내 옆으로 와서 팔을 당겨 안아달라는 아기 같은 어린이를 토닥이며 잠에 든다.

평범하더라도 반복되는 날이 계속되면 지친다.
뭐라도 즐거운 일이 터지는 특별함이 있었으면 좋겠고 재미없고 지루하고.
그치만 이 평범함이 쌓여 소중한 추억이 되는 걸 이번에 특히 더 느꼈다.
별 일 없이 산다는 말의 의미가 얼마나 큰 감사함인지.

오늘도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2021년을 맞이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