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 깊다’ 라는 표현을 언제 떠올렸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무의식 중에도 아, 그랬지 참 좋았는데. 혹은 잊지 못할 순간이었는데. 정도의 힘으로.
아마 머리 커가면서 어떤 것에 반응하고 감동하는 세포가 점점 죽어가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다.
미세한 바람도 내 것으로 받아들여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감수성은 갱년기가 되면 다시 살아나려나.
스페인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도시 론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잇는 누에보 다리는 한국에서 보던 자연, 절경에 대한 이미지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고. 절벽 위에 지어진 도시를 보면서 참 터프한 자연과 작디 작은 인간이 만들어 낸 조화로움에 입이 벌어졌다.
말라가에서 론다까지는 고속버스로 2시간 정도.
갑자기 내리는 비도 반갑다며 신이 난 우리는 다시 한 번 자네와 나는 결혼을 했으며 이것은 신혼여행이라는 것을 서로에게 묻고 확인하고 또 자지러진다.
터미널에 도착하고 론다까지 가는 표를 사야 하는데, 난 엉뚱한 긴 줄에 계속 서 있었다. ㅠㅠ
어떤 중국인 2명이 여기가 어디어디 가는 곳 맞냐고 물어봤는데 아니라고 론다 간다고 했었.. 미안해..
상황 알아차리고 인포데스크에서 물어보니 진짜 완전 딴판 한산한 곳에 표를 팔고 있었네.
말라가 버스터미널에서 론다에 가려면 19번 창구에 가서
이거 진짜 론다 가냐고 한번 더 물어주고. 시간 확인 후에 왕복 표를 사야 한다.
외진 곳이라 그런지 돌아오는 버스 막차가 저녁 8시 전이여. 이러니까 미리 사야 해 안 사야 해.
버스 탈 시간 임박할 때 쯤 31번에 가서 기달.
우당탕 덜컹컹 동서울 터미널에서 강원도 가는 기분이랑 매우 비슷하다.
조용하고 세련된 작은 도시 말라가에 있다가 론다에 오니 도시 전체가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유적지 느낌이 든다.
잔뜩 흐렸던 날씨도 분위기에 한 몫 한 듯 싶고.
사진으로 다시 보니 먹구름 낀 분위기에 누에보 다리도 그렇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영화가 떠오르는구만.
터미널에서 내려 언덕을 따라 쪼로록 내려 오면 작지만 탁 트인 광장이 있다.
여기도 말라가 못지 않게 반짝 광이 나는 바닥.
왔는가?
곰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소를 지나 앞으로 걸어가면 시야에서 갑자기 땅이 사라진다.
흐엉 진짜 콩닥거렸어.
빠밤.
누에보 다리 아래 협곡. 지이이이이이인짜 높아아아.
난간 근처엔 가지도 못하는 서방아 날 세우니 좋드나?
진짜 태어나서 높은 곳에서 느낀 공포중에 제일이로소이다.
세상에 마상에.
사진 찍고 건너편으로 걸어가서 내가 궁디 들고 까불던 곳을 보니.
무슨 종이 한 장 걸쳐놓은 것 같잖아…. 왜그래요 진짜..
저기 서 있는 사람들도 이 쪽으로 와서 보면 내가 미쳤지 싶을거야. 아무서워.
계속 누에보 다리를 걷다 보면 보이는 혜밍웨이 이름.
스페인 내전을 다룬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 론다가 등장한다지.
수도교를 볼 때도 느꼈지만, 자연이 만들어 놓은 아찔한 협곡 위에 다리를 세우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죽음과 맞서면서 돌을 쌓았을까.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40여년 만에 완공된 누에보 다리를 건너는 시민들은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연결되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로 이 곳을 소중히 여겼을 것 같다.
다리 중앙 아치형태의 여러 방들은 고문을 위한 감옥으로도 사용됐단다.
골짜기로 떨어져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태한 삶을 사는 포로들은 소통의 다리 중앙에서 힘 없는 눈을 굴릴 수 밖엔 없었겠지.
날씨가 쨍할 때 와도 심란할 것 같은 그림같은 풍경 앞에서 차라리 날이 흐려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계속 걷고 만져보고 내려다 봤다.
아찔한 협곡을 자세히 보고 싶어 아래로 내려가보기로 했다.
구시가지 골목을 걷다 보니 금방이라도 옛 사람이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에 참 묘했다.
근데 이 날의 나는 왜저리 촌스러운지 도대체가 모르겠닼ㅋㅋ
사실 스페인 여행 중에 가장 추울 것 같았던 날이라 가져간 옷 중에 따순걸 다 껴 입었는데.
서방아 눈이 있으면 보고 말을 해 주어야 할 것 아니오.
이왕 촌스러운거 한 장 더.
시키는대로 잘 함.
협곡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보이던 카페를 가려고 했는데.
아오 배가 너무 고파.
낄낄거리던 중에 눈에 띄던 가게에 그냥 들어갔는데. 어머나 맛집.
전통 있는 가게 아자씨가 자기 페이스북 가입하라며 주소도 적어주고 사진도 찍어줬는데.
와인 한 잔씩 마셨더니 얼굴이 벌거이 진짜 어디 촌 아들 시내 구경한 것 같아서 웃으면서 한국말로 거절함.
맛은 있었어요, 굿뜨.
자, 다시 내려가자.
웃고 있어도,
얼굴을 가려도,
여전히 촌스럽다…
아래로 내려와서 올려다 본 누에보다리.
차서방은 다리 한 쪽 나한테 맡기고 한 쪽만 엉거주춤 가서 사진찍고 울상ㅋㅋㅋ
고소공포증이 있습니다.
커피나 마시러 가시지요.
내 여깄구먼 시방 누구한테 전화거는겨?
론다에 있는 내내 어째 1분도 해가 안 나오나 서운했었는데
걷고 뛰고 앉아서 노닥거리기엔 참으로 알맞았던 것 같다.
어허어허. 아저씨한테 그러는 거 아냐.
다시 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마드리드에서 먹었던 것과 180도 다른 츄러스를 맛봤다.
KFC에서 치킨을 77번쯤 튀긴 기름에 속은 곰보빵처럼 뚫어놓은 밀가루 튀긴 긴 막대기를 스타벅스 시그니쳐 초콜릿보다 22배는 연한 초콜릿 국에 찍어 먹었는데.
그래서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아 론다.
여행의 묘오미이.